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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박, 한국 육상의 자존심(배경,국제무대,지도자)

by atos9301 2025. 6. 26.

육상 달리기 선수

이재박은 대한민국 육상 단거리 부문에서 최초로 아시아 정상에 오른 전설적인 선수로, 1970년대 한국 스포츠계에서 독보적인 존재감을 발휘했습니다. 특히 400m에서 뛰어난 기량을 보이며 한국 육상의 국제 경쟁력을 입증한 이재박은 선수로서의 업적뿐만 아니라 이후 지도자로서도 많은 후배를 양성하며 한국 체육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이 글에서는 그의 선수 시절 활약, 주요 국제대회 성과, 그리고 은퇴 후 행보까지 상세히 살펴봅니다.

목차

  • 1. 이재박의 성장 배경과 육상 선수로의 발돋움
  • 2. 아시아의 벽을 넘어선 질주, 국제무대에서의 쾌거
  • 3. 은퇴 이후의 지도자 생활과 육상 발전에 끼친 영향

1. 이재박의 성장 배경과 육상 선수로의 발돋움

이재박은 1951년 10월 15일 서울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운동에 재능을 보이며 자랐습니다. 당시만 해도 한국 육상은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추지 못한 상황이었으며, 특히 단거리 부문에서는 아시아권 내에서도 일본, 중국에 밀리는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재박은 고등학교 시절 육상에 본격적으로 입문하면서 그 실력을 빠르게 인정받기 시작했습니다.

이재박은 100m, 200m, 400m 전 부문에서 탁월한 재능을 보여주었지만, 특히 400m에서의 강인한 스피드 유지력과 레이스 운영 능력이 돋보였습니다. 그가 가장 주력으로 삼은 400m는 체력, 전략, 순발력을 동시에 요구하는 고난도 종목으로, 국내에서는 상대적으로 소외된 종목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 어려운 종목에서 한국 신기록을 연이어 갈아치우며 단기간 내에 국가대표로 발탁됩니다.

1970년대 초반, 그는 이미 국내에서는 경쟁자가 없는 선수로 군림하고 있었으며, 연습량과 자기 관리가 매우 철저한 선수로도 유명했습니다. 당시 육상은 열악한 환경에서 진행되었지만, 이재박은 체계적인 자기 훈련과 멘털 훈련을 병행하며 성실한 태도를 유지했습니다.

이재박은 1970년 방콕 아시안게임에 첫 출전하여 대한민국 육상계의 희망으로 떠오릅니다. 당시 그는 4x400m 계주에서 동메달을 획득하며 국제대회 첫 메달을 목에 걸게 됩니다. 이후 꾸준한 기록 향상을 통해 아시아 최고 수준의 400m 기록을 보유하게 되었고, 그의 이름은 점차 아시아 전역에 알려지기 시작합니다.

그가 사용한 훈련 방식은 당시로서는 혁신적이었습니다. 단순한 스프린트 반복 훈련뿐 아니라 근지구력 훈련, 유산소 인터벌, 고지대 훈련 등을 접목하며 과학적 트레이닝을 시도했습니다. 이러한 노력은 1974년 테헤란 아시안게임에서의 전설적인 결과로 이어지게 됩니다.

2. 아시아의 벽을 넘어선 질주, 국제 무대에서의 쾌거

이재박의 커리어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은 1974년 테헤란 아시안게임입니다. 그는 이 대회에서 남자 400m 개인전 금메달, 4x400m 계주 금메달, 그리고 4x100m 계주 은메달을 따내며 아시아 단거리 역사에 길이 남을 성과를 이룹니다. 특히 400m 개인전 금메달은 한국 남자 육상 최초의 쾌거로 기록되며, 그 해 대한민국 스포츠 대상 수상자로 선정되는 영예를 안기도 했습니다.

400m 종목에서 이재박이 세운 기록은 당시 세계에서도 경쟁력 있는 수준이었습니다. 그는 경기 초반 페이스 조절보다는 일정한 속도로 주행하면서 마지막 100m에서 폭발적인 스퍼트를 펼치는 전략을 주로 사용했으며, 이는 후속 세대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이재박의 기술적 강점 중 하나는 주력 유지 능력이었습니다. 200m 이후 급격히 속도가 떨어지는 많은 선수들과 달리, 그는 마지막 100m까지 스피드를 잃지 않는 체력을 갖추고 있었으며, 이는 꾸준한 웨이트 트레이닝과 전신 유연성 훈련의 결과였습니다. 실제로 그는 스트레칭과 워밍업, 쿨다운 루틴까지 철저하게 지키는 선수로 유명했습니다.

국제 대회에서의 활약도 꾸준했습니다. 아시안게임 외에도 아시아 선수권 대회, 국제 친선 경기 등에서 다수의 금메달과 입상 기록을 보유하며 대한민국 국기를 높이 들었습니다. 당시 해외 매체에서도 이재박을 “정확한 템포의 레이스를 구사하는 신사적인 스프린터”라고 평가할 만큼 그의 경기력과 매너는 모두 수준급이었습니다.

또한 이재박은 당시로서는 드물게 외국 선수들과도 친분을 유지하며 국제적인 교류에도 열려 있었고, 이는 이후 지도자로서의 커리어를 준비하는 데도 큰 자산이 되었습니다. 그가 남긴 400m 기록은 수년간 깨지지 않았으며, 지금도 여전히 ‘한국 남자 단거리 도약의 시초’로 언급되고 있습니다.

3. 은퇴 이후의 지도자 생활과 육상 발전에 끼친 영향

이재박은 1970년대 후반 선수 생활을 마무리하고 은퇴를 선언한 뒤, 바로 지도자와 체육 행정인으로서의 삶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경기력을 넘어 훈련 철학, 멘털 관리, 경기 운영 전반에 이르는 경험을 바탕으로 많은 후배들을 양성하는 데 주력했습니다.

특히 대한육상경기연맹과 각 시·도 육상협회에서 지도위원, 고문, 감독직을 맡으며 엘리트 육상 시스템을 구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그가 강조한 지도 철학은 “기록보다 훈련 과정이 중요하다”는 신념 아래, 훈련의 질과 선수 개개인의 특성을 반영한 맞춤형 프로그램이었습니다. 이 같은 훈련 방식은 단순히 엘리트 선수뿐만 아니라 생활체육 육상에도 영향을 주었습니다.

이재박은 서울시청, 한국체육대학교 등에서 정식 코치로 활동하며 국가대표 후보군을 대상으로 한 집중 훈련 프로그램을 운영하였고, 그의 제자 중 일부는 이후 전국체전, 아시안게임 등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성과를 올리기도 했습니다.

또한 그는 언론과의 인터뷰, 방송 해설, 스포츠 칼럼 등을 통해 지속적으로 육상의 중요성과 기초 체력 훈련의 필요성을 강조해왔습니다. “육상은 모든 스포츠의 기본이며, 스피드와 체력이 모든 운동의 근간이다”라는 그의 철학은 스포츠 전반에서 지금까지도 회자되고 있습니다.

2000년대 이후에는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육상 캠프, 유소년 육상 교실 등에 활발히 참여하며 차세대 인재 발굴에 앞장서고 있으며, 최근까지도 체육발전위원회, 생활체육 위원회 등에서 활동하며 육상 저변 확대를 위한 정책 제안에도 참여하고 있습니다.

이재박은 단순히 메달리스트가 아니라, 한국 육상계를 대표하는 교육자이자 개척자로 남아 있으며, 많은 선수들이 그를 ‘멘토’이자 ‘전설’로 부르고 있습니다. 그의 삶과 철학은 앞으로도 대한민국 스포츠계에 큰 영향을 끼칠 것입니다.

결론: 한국 육상사를 새로 쓴 이재박의 의미 있는 여정

이재박은 한국 육상 역사에서 단순한 기록 보유자를 넘어, ‘문화를 만든 사람’으로 평가받습니다. 열악한 스포츠 인프라 속에서도 아시아 정상에 오른 그의 질주는 지금까지도 한국 단거리 육상의 상징으로 남아 있으며, 그의 도전정신은 후배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

은퇴 이후에도 변함없는 열정으로 후학 양성과 체육계 발전에 헌신해온 그는 단순한 스타를 넘어 시대를 이끈 스포츠 리더로 평가되며, 한국 스포츠 역사 속에 오래도록 기억될 인물입니다. 그의 이름은 앞으로도 수많은 육상 팬들과 후배들의 기억 속에서 영원히 남을 것입니다.